Loading. Please wait.

loading...

(퍼옴)911 한국인 생존자 인테뷰에서...

qwosjddd 03/23/2017 조회수: 291
“우리가 저기쯤인데…”

현재 이동훈(41)씨는 로열캐나다은행 홍콩지점 상무로 있다. 부인 최승은(40)씨가 최근 존슨앤존슨 한국지사장으로 임명돼 한국 근무를 하는 까닭에 아내와 아이들을 보러 2주일 한 번꼴로 서울에 온다. 지난 8월 17일 일요일 오후 기자는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이 상무를 만났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그날의 상황을 3시간 가량 이야기했다.

처음 충격을 받고 넘어졌을 때 무슨 생각을 했나. “지진 아니면 지하 쇼핑몰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지하 몰에서의 폭탄테러는 그 전에도 한 번 있었다. 그래서 직원에게 911로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다. 불통이었다. 사무실 천장은 3분의 1쯤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복도로 통하는 회사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커먼 구름이 들어왔다. 직원들에게 문틈을 막으라고 말하고 TV를 켰다. TV에선 월드트레이드센터에 경비행기가 실수로 부딪혔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TV 화면을 보고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저기쯤인데’라고 소리쳤다. 처음엔 소방관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생각했다.”

언제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했나. 
“사무실에서 중계되고 있는 TV 화면을 보니까 비행기에 의해 뚫린 구멍이 너무 커 보였다. 빌딩이 금방이라도 뚝 하고 끊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또 언제 소방관이 올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물수건을 만들어 혼자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홀에 있는 첫 번째 비상구 문을 열었다. 시커먼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허겁지겁 문을 닫고 두 번째 비상구로 달려갔다. 비상구 문을 여니 맑은 공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 직원들을 데리고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이젠 살았다’고 생각했다.”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사람이 많았나.
“많았다. 55층까지는 내려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55층에 이르니 계단실에 사람들이 꽉 밀려있었다. 그렇지만 질서가 있어 차분했다. 계단 한 칸에 두 사람씩 서고 한 줄은 비워놓은 채 내려가고 있었다. 비워놓은 줄로는 노약자, 부상자, 부녀자 등이 빨리 내려갈 수 있었다. 이러다보니 한 층을 내려가는 데 5분 정도 걸렸다.”

소방관을 처음 만난 것은 몇 층인가. 
“40층 정도 되었을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내려가고 있는데 밑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방관들은 산소통, 도끼 등 무거운 장비를 메고 계단을 올라오느라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그들은 모자를 벗고 가슴을 풀어헤친 상태였다. 그들이 막힌 비상구를 깨고 열어줬다.”

그 이후엔 소방관을 언제 만났나.
“한참을 내려가는데 또 박수가 터졌다. 소방관 7~8명이 또 올라왔다. 그리고 2~3층 뒤처져서 앳돼 보이는 소방관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쳤고 나도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는 너무나 힘들어하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소방관이 된 신참 같았다. 이런 비상 상황이 아니면 도저히 투입되지 않았을 그런 앳된 소방관이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쟤가 90층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하고 걱정했다. 그 뒤 3개월 이상 꿈에서 그 소방관의 눈빛을 보곤 했다. 그때마다 잠에서 깼다. 죽으러 올라가는 사람을 향해 박수를 쳤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40층에서 1층 로비까지 내려올 때는 큰 문제가 없었나. 
“내려가다 보니까 23층 복도에 비상응급실이 설치된 것이 보였다. 소방관이 계단실 입구에서 두 줄로 줄지어 내려가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퍼스트 에이드(first aid) 라이선스!’ 응급치료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을 찾는 소리였다. 어떤 40대 백인 여성이 손을 들고 23층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1층 로비에 내려갔을 때의 상황은 어땠나. 
“1층 로비는 엉망이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현관문은 잠겨있었다. 로비에 있는 경찰들은 계단을 타고 내려온 사람을 지하 몰(mall)로 인도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뭔가 계속해서 퍽퍽퍽퍽 떨어졌다. 시커먼 모습이라 무슨 잔해인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게 사람들이 고층에서 떨어지며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어떤 소방관이 ‘혼자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옆 사람 손을 잡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내 옆에는 제니퍼 최가 있었다. 이동영씨는 보이지 않았다. 소방관 1명에 5~6명씩 손을 잡고 걸었다. 잔해를 헤치면서 걷다 보니 눈에 익은 잡화점 간판이 보였다. 그렇다면 ‘6 월드’까지는 100m 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6 월드’를 향해 걷는데 멀리서 한 줄기 빛이 비치고 있었다. 누군가 몰을 덮고 있는 지상에 구멍을 뚫어 사다리를 내려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비로소 지상으로 나갔다. 우리를 안내해준 소방관은 다시 사다리를 타고 안으로 내려갔다.”


그런 충격을 받으면 오래 간다는데, 어떻게 후유증을 극복했나.  
“살았다는 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잠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살아서 감사하다는 생각보다는 (죽은 사람들에 대해) 미안하고 슬픈 마음이 솟구쳤다. 3일 뒤 정신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내게 재난사고를 겪고 난 뒤에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의사는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3개월 동안 통원치료를 받았다.”

오랫동안 잠을 못 잤다고 했는데.
“꿈에서 세 사람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만난 어린 소방관과 사다리를 다시 타고 지하몰로 들어간 소방관, 23층에서 응급치료 자원봉사를 지원한 백인 여성이었다. 죽으러 올라가는 소방관에게 박수를 쳐서 올려 보냈다는 죄책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응급치료 봉사를 자원한 그 백인 여성은 55층부터 함께 계단을 내려온 사람이었다. 자격증이 없어도 도와줄 수 있었는데, 그 여성의 얼굴이 떠올라 살아있는 게 미안했다.”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08082201321

전체댓글 0

0/200
DISCLAIMERS: 중앙일보는 이 광고에 대한 내용을 보증하지 않으며, 이 광고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개인의 모든 손실과 손해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이 광고를 본 후 결정한 판단에 대한 책임은 이용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최신 미국생활이야기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